[경기 여주] 영릉(英陵) -세종,소헌왕후릉-


한글날에 즈음하여 영릉(英陵)에 가다..

23년만에 공휴일로 재지정된 한글날!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학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만들어 반포된 유일한 글자
훈민정음(훈민정음예의본과 훈민정음해례본)은
국보 70호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매년 유네스코에서 문맹 퇴치에 힘쓴 사람을 선정해 세종대왕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올해(2013년) 6월에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신청과정에서 시끄러웠던 기억이 나네요.

여하튼

이런 훌륭한 글자를 반포한날은 공휴일로 기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늦게나마 제자리를 찾아서 다행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날씨 좋은 한글날전 주말, 훈민정음 탄생의 기틀을 마련하고 반포하신
성군중 성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같이 묻혀있는 여주 영릉에 다녀왔습니다.

※ 자료를 찾다보니 다음지도와 뉴스/블로그 여러군데에 소현왕후로 되어있던데 소헌왕후가 맞습니다.
다음 지도등은 빨리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드라마의 소현세자때문에 나타난 오류 인 것 같습니다.

다음에 오류 신고했더니 수정되었네요.

 

 

영릉(세종대왕릉) 입구의 모습

이제 조금씩 가을의 색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광욕중인 잠자리

 

 

 

 

 

은행잎(?)들고 기념사진

절대 연출사진이 아닙니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어디서 줏어온 은행잎을 자랑하는 재협군.
노란 은행잎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비실비실한 잠자리를 잡은 재협군

나무에 앉아있던 잠자리 잡고 좋아하는 재협군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는지 재협군에게 잡힐 정도로 잠자리들이 힘이 없더군요.

 

 

 

 

 

형아 따라 은행잎 줏고 좋아하는 준우군

샘이 많아 재협군이 하는건 모두 따라하려합니다. ㅠㅠ

 

 

 

 

 

세계문화 유산 (조선왕릉)

519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조선왕조
그리고 27명의 왕의 묘가 모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세계 역사에서 보기드문 조선왕릉

 

 

 

 

영릉(세종대왕릉)의 야외전시장

혼상(좌상) : 별자리를 적도,황도 좌표에 맞추어 표기한 천문기기
원래는 물의힘으로 하루에 한바퀴씩 자동으로 돌게되어있어
1년 절기를 파악할 수 있게 되어있었답니다.
실제 움직이는 모습 그래도 복원했으면 참 좋을 것 같네요.

간의(우상) :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천문관측기기
원래 중국에서 개발된 것인데, 세종이 국산화(?)에 성공한 첨단기기 입니다.

천평일구(우중) : 해시계의 일종

혼천의(우하) : 10,000원권 뒤에 있는 천문관측기기
정확히는 행성을 관측하기 위한 기기인데 후에 물래바퀴 동력을 이용한
혼천시계로 개량되었습니다.
세종때 만든 것은 모두 소실되고 현종때 만든 혼천시계만 남아있으며
그중 혼천의부분만 복원해 놓은 것 입니다.

적도의(좌하) : 혼천의와 간의를 토대로 만든 천문 관측기기

 

이외에도 유명한 물시계인 자격루등도 전시되어있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냥 물통 3개만 있는 모습이라 촬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격루는 중종 31년(1536)에 만들어진 것으로 자동시보장치가 없는 것을
복제해 놓은 것으로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원래 세종이 만든 자격루는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동 시보장치가 있습니다.
2007년 큰돈을 들여 시보장치를 복원하였고 고궁박물관에가면 볼 수 있지만
온전한 모습은 아닌 듯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목각인형과 그 장치는
15세기 세계적인 최첨단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동시대의 프라하 천문시계를 보고 사람들이 감탄하지만
개인적으로 완전 복원된 자격루를 본다면 프라하 천문시계에 뒤지지 않는
아니 그 보다 뛰어난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규모면에서도 충분히 압도할 만한 장치입니다.

프라하의 명물 천문시계도 현대에들어 오랜시간 복원한 것 인데.

우리나라도 자격루를 제대로 복원하여

원래 위치인 경복궁 경회루앞에 복원해 놓았으면 좋겠다는게 제 소망입니다.

 

그럼 세종은 왜저렇게 천체 관측에 힘썼을 까요?
바로 당시 국가 주요 산업인 농사 때문입니다.
천체현상을 관찰하여 백성에게 때를 알려주는 일 곧, ‘관상수시(觀象授時)’는 임금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황제 뿐이기 때문에

중국 영향권의 다른나라에서 천체관측을 하는 것은 중국 황제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일을 세종은 극비 프로젝트로 중국 몰래 진행한 것이죠
실제 궁궐도에 천문관측대는 표시 하지 않을 정도로 극비로 진행한 일 입니다.

마치 미국 몰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과 비슷한 대형 프로젝트 였겠죠.

프로젝트는 실제 상당한 결실을 봐서
우리나라 독립적인 역법(달력) 계산이 가능했졌습니다.
바로 <칠정산>(七政算) 내편과 외편입니다.
중국과 아랍의 계산 방식을 서울 기준으로 수정하여
세계 3번째로 역법을 계산한 나라가 됩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고유의 역법인 음력은
달과 태양의 운동을 관측한 정확하게 태양태음력입니다.
날짜는 달의 움직임에서 계절은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나온 역법입니다.
24절기는 실제로 양력이며, 요즘 양력과도 거의 일치합니다.

(춘분은 양력으로 매년 3월 21일 경이됩니다.)

박연과 함께 음악을 정비한 중요 이유중 하나도
도량형을 표준화하기 위한 것 이었습니다.
한국 고유의 기준음 (황종음)을 정하고 그길이를 조선 도량형의 원기로 삼고
그를 토대로 부피등을 표준화 한 것이죠.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독립을 위해 노력했는데.
전시에 작전권 하나 환수하는데 질질 끌고 눈치보고 있는 현 정부를 보면 답답하기까지 합니다.

 

 

영릉(세종대왕릉)의 야외전시장 전경

 

 

 

영릉(세종대왕릉)의 재실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집
기둥이 사각형 모양인 건물인 걸로 봐서 왕가의 건물은 아니다.
참고로 왕가 건물 기둥은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입니다.

 

 

 

 

 

 

 

 

 

철모르는 준우군은 그저 흙장난이 좋을 뿐

 

 

 

 

 

 

 

 

 

영릉(세종대왕릉)의 재실

 

 

 

 

영릉(세종대왕릉)의 호수

우리나라 전통 조경을 따른 사각형 모양의 호수
하지만 중앙에 원형 섬이 없어 NG

아파트등에서 볼 수 있는 돌을 계단모양으로 쌓아 만든 조경은 일본식 조경입니다.
일제 시대의 조경술과 일본의 건축학이 아직까지 건재하다는 이야기기도 하죠.

 

 

 

 

영릉(세종대왕릉)의 홍살문과 금천교

신성한 영역을 구분하는 문과 다리
저곳을 지나면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에 들어서게 됩니다.

홍살문 옆 판석에서 제관은 사배를 하고 참관자는 망배를 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망배(望拜) : 멀리서 연고가 있는 쪽을 향하여 하는 절
사배(四拜) : 네 번 하는 절

 

 

 

영릉(세종대왕릉)의 금천교

능앞을 흐르는 개울 (금천, 어구)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 합니다.
금천교 안쪽의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며
풍수지리적으로 땅의 기운이 더이상 못나가게 하는 역할도 한답니다.
일제시대 때 회손된 것을 발굴하여 2008년에 복원한 것이라네요.

 

 

 

 

  영릉(세종대왕릉)의 잘못 복원된 삼도(三道)

가운데 높은 곳은 임금의 혼령이다니는 신도(神道) : 신위를 든 제사장이 다니는 길
좌/우의 낮은 어도(御道) : 우측엔 황제, 좌측엔 신하가 다니는 길 (우상좌하)

하지만 삼도는 중국의 황제능에서나 볼 수 있는 것 입니다.
제후의 나라인 조선 왕릉은 좌측에만 어도가 있는 이도(二道)를 따르는 것이 원칙입니다.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릉(홍릉)과 순종릉(유릉)을 제외하고는
삼도(三道)는 원래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 이죠.

그리고 경복궁에서 볼수 있듯 자연스럽게 박석을 깔아야하는데 이건 뭐 정체 불명의 길이네요.
그리고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길이 45도로 꺽여 있는데
원래 위치가 아닌 듯 합니다.

전문가의 고증절차를 거쳐 다시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몰라서 이렇게 복원한 것일까요?
그건 아니겠죠 누군가 의도적으로(특히 정치적인 의도) 잘못 복원한 것입니다.
 그럼 누가 이렇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구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제일먼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의미로

이순신장군을 과대 부각하기 시작합니다.
난세 구국의 영웅 이순신=박정희 뭐 이런걸 기대한 것이 겠죠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당이 현충사가 됩니다.
하지만 급하게 현충사를 성역화 하면서 조경을 모두 일본식으로 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천왕을 상징하는 금송을 사당 앞에 심었죠.

노태우 대통령 때 논란이 일어 재 복원을 지시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최근 혜문스님이 문화재청을 상대로 소송까지 진행 했으나
문화재청 전원 찬성으로 아직까지 금송과 조경은 건재하게 살아 있습니다.

여하튼 너무 무인만을 성역화한다는 반론이 일자
그 대안으로 나온 인물이 세종대왕입니다.

그래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할 당시
여론을 무시하고 현판을 한글로 쓰는 등 한글 우선정책도 지원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도 때문에 여주의 세종왕릉(영릉)도 성역화 작업대상에 포함되었고
따라서 현재 조선왕릉중 가장 큰 능역을 그대로 유지한 왕릉이 됩니다.
 
그렇지만 너무 치켜세우다보니 황제릉의 예제에 따라 복원하게 되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빠른 시일내 원래 조선 왕릉의 모습으로 복원 되었으면 합니다.

 만약 복원한다면 관광객용 오솔길 하나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잔디밭쪽은 막아놓아 못들어가고, 신도와 어도로 다니기에는 조금 거북스럽더군요.

 

 

 

 

 

영릉(세종대왕릉) 전경

세종의 능은 원래 내곡동에 위치한 아버지(태종)의 능인 헌릉 서쪽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성될 때부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며 논란이 있어고, 지관들이 강력하게 능자리를 철회하자고 권했지만
세종은 아버지 곁에 묻히겠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종의 뜻대로 능을 조성하였지만 논란은 계속되었고
결국 결국 예종 1년(1469)에 천장했는데
그곳이 풍수지리 상 한국 최고의 길지 중에 하나라는 현재 위치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봐도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무언가 기운이 가득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영릉(세종대왕릉) 정자각

제물을 차리고 제례를 드리는 집
동/서에 계단이 있으며 동입서출(東入西出)이 원칙이다.
건물모양이 정(丁)자와 비슷하여 정자각이라 합니다.

그런데 없어야할 계단이 하나 더 있습니다.
참도를 삼도로 놓는 바람에 두 개의 계단이 놓여야 할 정자각에
계단 하나가 더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영릉(세종대왕릉) 정자각의 잡상(어처구니)

 

 

 

 

 

 

 

 

 

영릉(세종대왕릉)

여주로 이장하면서 기존의 석물들은 무거워서 땅속에 묻고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의 석물보다 위엄면에서 조금 떨어집니다.

원래의 석물들은 조선 전기의 "국조오례의"에 따라 조성되어 석물들도 큼직하고 섬세합니다.
지금은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 마당에가면 볼 수 있습니다.

 

 

 

 

영릉(세종대왕릉) 에서 바라본 정자각

 

 

 

 

영릉(세종대왕릉) 무인석과 석마

 세월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지나가던 젊은 처자가 유럽의 조각들보다가 한국 것을 보면 정교하지 않다고 하더군요.
아마 유럽의 웅장한 건물과 조각에 감탄하고 온 모양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돌은 화강암이고
유럽은 퇴적암인 사암계통이 많습니다.

유럽에서 화강암은 알프스등에서 나오는 아주 귀한 돌이죠
단단한 화강암을 유럽처럼 정교하게 조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정도면 상당히 공을 들인 조각입니다.

대신 유럽의 조각들은 비바람에 부셔져서
매년 보수공사를 해줘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수천년을 버티는 튼튼한 조각입니다.

 

 

 

영릉(세종대왕릉) 혼유석과 장명등

바둑판 처럼 무덤 앞에 펼쳐진 판석이 혼령이 나와 쉬는 혼유석입니다.
장명등은 석등으로 팔각기단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세종대왕 할아버지(?)한테 인사를하고 내려가는 재협, 준우군

재협군에게 이런 글씨를 만들어서 누구나 쉽게 읽을수 있게한 사람이 누구야 물어보니

시크하게 "나" 라고 대답하고.

 

준우군은 왕릉에서 절하라하니 뭐가 심통이 났는지 도망다니고..

통제안되는 두아이 델고 어렵게 다녔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던 여주 영릉 나들이 였습니다.

 

 

소현왕후 → 소헌왕후로 바꿔 주세욧!

 

| CANON EOS 5D Mark III | CANON EF 24-70mm F2.8/L | 2013.10.6 |
※ 사진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있으며 편집 및 상업적용도의 사용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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